(What I Feel About Walt Whitman)

 

(2014. 12. 17. http://www.poemspace.net/게시)

(한맥문학 통권 294호, 2015. 02. 25)

 

에즈러 파운드(Ezra Pound)

주근옥 역

 

휘트먼이라고 하는 대서양의 이 가장자리에서, 그리고 그 가장자리라도 서있게 된 내 지식의 우월한 지위에서, 나의 세계 시민권의 그 지위에서(만약 나의 부족한 연륜이 허락될 수 있다면), 나는 휘트먼을 읽을 수 있는 최초의 시간을 갖고 있는 것이다. 나는 Carmen-Hovey 시대 예술가 이전의 유일한 시인, 즉 미국 시인, 더 좋게 말해서,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미국 시인”으로 따라서 관습적으로 인식된, 그를 바라보고 있다.
   그는 미국에 존재한다. 그의 생경한 시는 상상을 초월하는 극도의 악취를 풍기고 있지만, 미국에 존재한다. 그는 그의 시대와 함께 메아리치고 있는 바위속의 빈 공간으로 존재한다. 그는 엄격한 극을 영창(咏唱)한다. 그리고 그는 “의기양양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그는 구역질이 날 지경이다. 그는 매우 욕지기나게 하는 알약과 같은 것이지만, 그는 그의 사명을 성취했다.
   완벽한 인간의 르네상스 인문주의적인 이상으로부터, 또는 그리스 이상주의로부터, 일탈한 바로 그 자유를, 그는 그가 존재하는 것이 된 내용으로 존재케 한다. 그리고 그는 그의 시대와 그의 민중으로 존재한다. 그는 천재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가 존재하는 것의 그리고 그의 역할의 통찰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출발점으로 존재하며, 그의 작업이 의고(擬古)적으로 끝나지 않는 다는 것을 나는 안다.
   나는 나에게 적중된 그를 존경하며, 오로지 내가 자부심을 가져야만 하는 선조로서의 그를 감사하게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
   미국에는 국민의 치료를 위해 많은 약들이 있지만, 사람들은 그를 쓴 약을 먹는 세련된 미각에 비유한다.
   휘트먼에 관해, 나는 많은 부분에서 살을 에는 듯한 아픔과 함께 읽고 있지만, 내가 어떤 것을 쓸 때, 나는 그의 리듬을 사용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광대무변의 의식과 관련된 어떤 것의 표현은 인도네시아의 여성 운동가 마라미스(maramis)의 아픔과 같은 휘트먼의 이 아픔으로 얼룩지는 것 같다.
   나는 그 연대의 상속인으로 존재한다(교육받은 모든 남자와 공동으로). 그리고 나는 나의 생득권(生得權)을 요구한다. 그러나 만약 휘트먼이 지적-예술적 삶의 내 규범에 익숙해진 것을 허용하는 언어로 그의 시대를 기술했다고 한다면, 그는 그의 시대와 국민의 정서를 잘못 전하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오로지 그의 “연대와 연대의 치장붙임(ages and ages' encrustations)”으로 또는 다음 연대의 치장붙임을 요구하게 된 것으로 존재할 것이다. 미국의 수액(樹液)과 섬유조직으로부터 채취된 내 메시지의 활력이 넘치는 부분은 그의 것과 동일한 것이다.
   정신적으로 나는 휘트먼이 블라우스와 와이셔츠 입는 법을 배웠던 그런 방식으로 존재한다(비록 둘이 동시에 적의가 있다고 할지라도). 개인적으로 나는 나의 정신적 아버지로서의 관계를 비밀로 간직한 것을 매우 기쁘게 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더 나아가 같은 정신의 선조-단테(Dante), 셰익스피어(Shakespeare), 테오크리토스(Theocritus), 프랑수와 비용(François Villon)에 대해 자랑한다. 그러나 그 혈통은 나를 프랑크 인으로 만들기에는 다소간의 어려움이 있다. 휘트먼은 단테가 이태리에 있는 것과 같이 나의 조국(Patriam quam odi et amo for no uncertain reasons; 나는 명확한 판단력보다 더 우리나라를 싫어하고 사랑한다)에 있다. 그리고 나는 기껏해야 잃어버린 모든 것을, 일시적으로 제자리에 안주하지 못해 찾지 못한 미를, 진실을, 용맹을, 그리스 이태리 영국에서 누렸던 영광을, 그리고 그 밖의 모든 것을 쟁취하기 위한, 다시 말해서, 미국의 르네상스를 위한 투쟁으로만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만약 어떤 사람이 휘트먼의 해질 녘의 산들바람처럼 시를 썼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휘트먼을 사랑하는 것일 것이다. 나는 우리가 그 사람의 생각 깊은 예술성에 충분히 주의를 아직 기울이지 못했다고, 세부적으로 그러면서도 전체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휘트먼처럼, 그러나 다소 활력이 떨어지는, 그러면서도 미를 보다 더 많이 사랑하는 것과 같이 존재한다(만약 내가 그가 했던 것보다 미를 진실로 더 깊이 사랑한다고 한다면). 단테처럼, 그는 “저속한 어투”의 새로운 운율로 시를 썼다. 그는 민중의 언어로 시를 쓴 최초의 위대한 시인이었다.

   나였다면, 페트라르카 풍의 옛날 말로 시를 썼을 것이다(Et ego Petrarca in lingua vetera scribo). 그리고 민중이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옛날 말로 시를 쓰는 태도는 내가 휘트먼을 옛날의 세계로 밀어붙이고 싶어 하는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나는 썰매를 타고, 그는 송곳으로 구멍을 뚫는다. -그리고 모든 옛날의 미와 함께 미국을 채찍질한다. (왜냐하면, 미는 고발되어야만 하는 것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호머(Homer)로부터 예이츠(Yeats)까지의, 테오크리토스로부터 마르셀 슈보브(Marcel Schwob)까지의, 다수의 채찍과 함께. 이러한 욕망은 내가 젊고 조급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며, 만약 내가 늙고 현명하다면, 나는 이러한 것들이 다가오는 것을 그냥 보고 말함으로써 스스로 만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들의 미가 진실한 예언이 될 것이라는 것을 결코 확신하지 않는다. 나는 그 진통의 결과가 내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지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그것은 아는 사람만이 읽을 수 있는, 위대한 산물이며, “그의 책략은 나의 책략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을 내 것으로 쉽게 만들 수 있다.” 따라서 “그의 메시지는 나의 메시지이다. 우리는 그것을 듣는 바로 그러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각주

1. Walt Whitman(1819∼1892): 1855년에 「풀잎」을 자비출판. 형식도 내용도 전혀 전통을 깨뜨린 것이어서 평이 좋지 않았으나, 에머슨의 칭찬의 편지를 받고 용기를 되찾았다. 민주주의의 근본 원리와 문학과의 관계를 저술한 「민주주의의 전망」(1871)은 미국 민주주의의 3대 논문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Richard Hovey(1864∼1900): 미국의 시인. Georges Bizet(1838∼1875): Carmen의 초연-1875년 3월 3일 파리 오페라 코미크 극장. (역주)
   2.
마라미스(Maria Josephine Catherine Maramis, 1872~1924)는 일반적으로 Walanda Maramis로 더 알려져 있다. 그리고 20세기 초 인도네시아의 여성 환경을 진전시킨 노력으로 인도네시아의 국민 영웅으로 인식된다. (역주)
   3. Theocritus: 기원 전 3세기 전반의 그리스의 목가 시인. (역주)
   4.
François Villon(1431~1463 추정): 파리 서민 가정에서 출생하여 사제 기욤 비용의 양육을 받았다. 솔본느 대학에서 수학. 성품은 선량했으나 의지가 약하여, 연애 사건 때문에 과실 치사죄를 범하고, 악한 친구와 공금 절도를 범했다. 그 이후 방랑과 굶주림, 절도와 영창, 다시 감옥살이 등 파란 많은 일생을 보냈다. 1463년 이후의 생활은 알 길이 없다. 작품집으로 「소(小)유언집」(1456), 「대(大)유언집」(1461) 등이 있다. 비용의 작품은 개인적 감정을 통하여 뉘우침, 비웃음, 분노, 기원, 호소 등을 사실적으로 노래했다. 그가 죽은 후 3백 년 동안은 그 진가가 묻혀 있었으나, 19세기 중엽 베를렌, 보들레르 등이 등장하면서 재 평가받기에 이르렀다. (역주)
   5. 마르셀 슈보브(Marcel Schwob, 1867~1905): 19세기 말 프랑스의 소설가·학자. 고전문학·중세문학을 비롯, 셰익스피어, D. 디포 등의 소개자이다 상징주의자의 영향을 받았다. 작품은 「이중의 마음」(1891), 「황금 가면의 왕」(1892), 「프시케의 램」(1903) 등이다. (역주)

 

휘트먼의 시집 풀잎 서문_주근옥 역

휘트먼의 민주주의 전망_주근옥 역

와동주의(渦動主義)_에즈러 파운드/주 근옥 역

에즈러 파운드의 이미지즘 시학(현영민)

사상주의 시론 연구(이세순)